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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7 못 된 장난 [책]

blauping 2010. 2. 18. 00:25

 

못 된, 못 된, 못 되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못된'이라는 단어가 입에 자꾸 남아있었다.

못된 (형용사) 1. 성질이나 품행 따위가 좋지 않거나 고약하다.

                    2.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14살 소녀 스베트라나가 기차 철로에 누워 죽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든 그 일이, 과연 '못된'이라는 단어로만 표현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싶었다. 사이버테러로 인해 한 아이가 엄청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았고, 그로인해 자신의 감정을 판단하고 제어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도벽이 생기고, 급기야 자살을 선택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 '못된' 장난 때문이었다 라고 하기에는 못된의 어감이 너무 가벼운듯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 라는 속담이 익숙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못된'이라는 단어 외에 적절한 말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이야기.

사이버테러라고 하면 연예인에게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악성 댓글과 루머에 시달리며 심지어는 연예인 자살의 큰 이유 중 하나가 사이버테러라는 것을 기사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연예인이 늘 현실 밖의 존재로 느껴지듯 그 일 역시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라고 하는 유럽의 변방에서 이민 온 14살 평범한 소녀가 학교에서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전혀 먼 이야기가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누구나 선진국임을 인정해 마지않는 독일에서도, 이런 비인격적이고 폭력적인 일이 학교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유난히 IT 보급이 빠른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면을 쓰고 공격하는 익명성의 세계.

십여 년 전, 나의 학창생활 때만 해도 인터넷이 그다지 활성화되어 있지는 않아서, 처음 개설한 메일 계정에 기뻐하며 매일 만나는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반 친구의 한 통의 메일에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오프라인의 인맥뿐만 아니라 온라인의 인맥까지도 관리해야 하는 시대가 왔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언제든지 변신 가능한 시대가 왔다. 사이버 세상에서 쓰게 되는 여러 가지 가면은, 남을 공격하고도 자신은 언제든지 안전한 곳에 숨어버릴 수 있게 만들었다. 어디로든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망갈 수 있다는 것, 실제 자신의 이미지는 훼손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사이버 상에서 범죄가 만연한 이유가 아닐까. world wide web이라는 말처럼 어디서든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의 접근성은 사이버 테러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누구든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소설의 장점은 특정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그 현장에 있는 것 처럼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 역시 흡입력있게 사이버 테러 현장에 나를 데려갔지만,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은 여전히 물음표로 남기게 하였다. 사실 이러한 실생활과 밀접한 문제는 그것의 치유과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스베트라나가 결국 그 학교를 떠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 편해졌다 라고 하는 결론은 지극히 편안하기만 한 마무리가 아닌가 싶다.